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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의 빗방울과 다른 빗방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서

늦은 밤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차,

명확하게 갈라지는 헤드라이트의 각도처럼

밤의 두꺼운 마분지를 찢어

왼쪽의 어둠과 오른쪽의 어둠을 구별할 수 있어서

눈이 멀 것 같은 찰나의 공포를 지나,

밤의 검은 빛깔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색깔들을 건져낼 수 있다면 건져내,

외로운 별의 고리에 수술처럼 달아놓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영혼의 핀셋을 나무의 긴 손가락에 쥐여주고,

계절의 톱니바퀴에 감긴 울음과 울음의 결들을 다 뽑아

한낮의 푸른 잎으로 달아놓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그 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가,

고독이라고 써놓은 깃발처럼 펄럭이는가

바람은 힘껏 달아나는 개 뒤에 끌리는 긴 줄이 바닥에 감아치는 문장처럼, 분다

/신용목, 시간은 취한 듯 느리고

 

 

신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느라 여름의 더위를 다 써버렸다.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해 안개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아침이었다.

밤만큼 완벽한 책이 있을까?

누구나 각자의 페이지에 그어지는 밑줄로 살아가지만

인생은 쓰여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려고 부재하는 신에 대한 기록처럼,

그 이면에 간인한 근로계약서처럼 구겨지는 것이다.

안개가 골목으로 사라지는 고양이 한 마리를 문지르는 아침이었다.

나는 긴 터널 속에서 어둠을 막대처럼 뽑아 사랑이라고 적힌 병을 내리쳤다.

/신용목, 잉크

 

 

크루아상처럼 접힌 어둠을 뒤적이면
새로 생긴 주저흔이 반짝거립니다
맡겨놓고 찾아가지 않는 푸들 같습니다

 

이런 날은 자면서도 발끝을 오므립니다
꿈에서도 말을 더듬습니다

 

문법이나 행간 없이도 이해되는 친절한 악몽입니다
꿈이 길지 않으니 내일쯤 당신이 당도하겠다 싶습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사랑이 어디인지 묻지도 않습니다

/김병호, 아무렇게나 사랑이

 

 

아삭거리는 아오리를 칼로 쪼개면

아오리의 풋말들이 푸른 들개처럼 달려온다

벌겋게 무르익는 건 사절이야

즙이 뚝뚝, 자두 복숭아의 물러터진 얼룩도 사절이야

사월의 사과꽃과 유월의 장맛비를 지나

구름 밖으로 달아나는 사과의 둥근 발자국들

 

여전히 푸른 궤도를 도는 것들

잇바디처럼 촘촘히 기입된

기억의 살점을 베어 문다

잠시 제철인 저 아오리의 푸른 질량

발목까지 푸른 칠월의 어느 오후

/박수현, 아오리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머물던 자리의 투명은
언제나 자국이라 부른다

 

목마른 벌레의 기분으로
물병에 꽂힌 조화造花를 바라볼 때
매일 아침 탁자를 순례하는 고독이
둥그런 자국을 남긴다

 

천사는 늘 과장법이었고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궤적도
언어의 순도를 지키지 못했다

 

수면에 비친 오필리아의 얼굴마저
덧칠한 불순물로 일렁거릴 무렵

 

순수함은 증발하는 위선에 시간을 더한 것
오래된 찬양을 위해서 자주 신의 이름을 불렀다

 

젖은 종이가 마르면 아직도 사막이 지글거린다
세속적 욕망을 채운 물자루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경멸했던 낙타는
경전을 운반하며 일생을 보냈다고
낙타의 등에서 함께 밤이슬을 맞던 순례자가
물 얼룩 때문에 목숨을 끊을 때

 

한 폭의 수채화가 진실을 목마르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이 담겼던 그릇에서
투명의 반대편은 잊기로 하자
촛불이 꺼질 때까지

 

물감이 풀린 성수聖水는 오직 자신을 용서하는 중이다

/기혁, 물의 정물

 

 

    —르네 마그리트, 「Listening Room」에 부치는 시

 

   푸른 고독의 왼뺨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 화가의 두개골, 동시에 자궁이면서 심장인 둥그런 입체 여기, 사과가 있다 내재율의 방이 있다 악공은 가고 홀로 우는 만돌린이 있다 나는 이음새 없는 그것을 돌며 문을 찾으려 했다. 그러자 그것은 우웅…… 소릴 내며 문 없는 건축물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장애물이 없는 수평  이동이었다 화가가 낳은 그것  또한 자궁인 동시에 두개골이며 심장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그것의 삼위일체에 몸을 맡겼다 이제 막 귀가 생기고 듣는 능력을 얻은 태아처럼 웅크려 건축물 바깥으로 귀를 모았다 사과가 사과인,사과로서의 경로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들판의 일을 지나 저곳, 아득한 백악기가 내쉬는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우주 저편,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듣는 일의 가없음에 휩쓸려 ‘있음’ 자체가 파열될 것 같은 충만감에 압도되었다 우주미아가  되어 말할 수 없는 광활한  고독감 속으로 내던져졌다 하나를 이루는 일은 개별을 버리는 일이었다

/조정인, 청사과

 

 

다육 한 점이 꽃을 피웠다.
아무도 몰래 살며시 이틀 잎을 열었다
다시 닫아버렸다.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천 년 비바람과 일억 광년 빛이 섞였던 것,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대’는 지울 수 없는 상흔.

이 넓은 우주에서 이 짧은 찰나에
우리 이렇게 만났다 다시 처음처럼 헤어진 것만으로
기적이고 황홀이다.

/정한용, 지극